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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덤

뜨거운 안녕 김은경 목욕탕에서 때를 밀다 속옷을 갈아입다상처에 눈 머무는 순간이 있지훔쳐봄을 의식하지 않은 맨몸일 때 가령 상처는가시라기보다는 빨강 도드라진 꽃눈일 텐데눈물로 돋을새김 한 천년의 미소래도 무방할 텐데 어디에 박혔건 내력이야 한결같을 테지만죽지 않았으니 상처도 남은 것 그리 믿으면더 억울할 일도 없을까 오래전 당신은 내게 상처를 주었고 나는 또 이름 모를그대에게 교환될 수 없는 상처를 보냈네403호로 배달된 상처 한 상자를 대신 받은 기억 있고쓰레기 더미 속 상처를 기쁘게 주워 입기도 했네 지나갔으니 이유는 묻지 않겠어 당신왜 하필 내게 상처를 주었는지하지만 얇은 유리 파편으로 만든 그 옷내게는 꽉 끼었지 그래 나는 아팠었..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는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공주처럼 치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3월이면 아직은 추운 날씨다. 저녁 즈음 바닷물을 스치듯 막 빠져나온 흰나비가 초승달이 뜬 서쪽 하늘로 낮게 날아오르고 있다. 나비가 좋아하는 꽃이라도 피어 있었으면 지친 몸을 잠시라도 쉴 수 있으련만, 드넓은 바다 어디에도 나비가 쉴 곳은 없다. 초승달은 음력 초사흗날 저녁 서쪽 하늘에 낮게 뜨는 눈썹 모양의 달이다. 밝고 환하고 둥근 보름달이었다면 공주처럼 지쳐 돌아오는 흰..

암癌 임태진 다 늙은 여자 몸이 뭐가 그리 좋다고 구순 노모 가슴에 둥지를 틀었을까 암세포 너도 나처럼 그리웠구나 엄마 젖이 임태진 시인의 암癌>을 읽는다. 시인의 시작 노트를 보면 어머니는 결혼 후 남편 둘을 하늘로 보내고 아들 셋은 가슴에 묻었다고 한다. 한 많은 제주 여인으로 평생 가슴앓이를 하며 사셨고 노후에는 병환에 시달리다가 구순에 접어들면서 유방암 진단마저 받으셨다 한다. 하루라도 마음 편한 날 없었을 것 같은 지난한 생애가 무겁게 다가온다. 독주를 단숨에 들이키면 ‘카’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 작품도 단숨에 들이키듯 읽히지만 ‘카’하는 신음은 깊은 한숨으로 바뀌고 만다. 암으로 어머니를 보낸 자식이 ..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가요.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

이별의 章 .... .헤에 ! 에야어 ! ..... .못가겄네 못가겄네.차마 벅차서 못가겄네,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데어느 누구 편안허냐?이제 가면 언제 올까?올 날이나 일러를 주소. 어느 이름 모를 山野를 지나가다 아픈 다리를 쉬고 있는 나의 視野에 문득 저만치 輓章의 행렬이 지나간다.음산한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가슴에 와 박힌다.나도 언젠가는 이 삐걱거리는 回轉木馬를 내려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이들을 작별하고 저처럼 홀로 떠나겠지.내일 당장 모든 이들과 이별 할지 모른다.나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이별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가? 이별이란 가슴 아픈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는 세상의 이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린 채맨발로 저 荒涼한 들판을 지나 멀고 먼 北邙山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이..

모순의 흙 -오세영- 흙이 되기 위하여흙으로 빚어진 그릇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순간에바싹 깨지는 그릇인간은 한 번죽는다.물로 반죽하고 불에 그슬려서비로소 살아 있는 흙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불에 탄다.하나의 접시가 되리라.깨어져서 완성되는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흙이 되기 위하여흙으로 빚어진모순의 흙, 그릇. 시작품은 감상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분석, 즉 독해(讀解)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오세영의 시 ‘모순의 흙’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독해가 필요한 시는 그 단서를 행간에서 찾아야 한다. 시의 첫 행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이란 그릇의 숙명, 다시..

겨울 사랑 고 정 희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면 될 때가 있습니다. 단 하나만으로도 충분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은 끝에 마주한 따뜻한 차 한 잔. 정말 이것이면 모두 괜찮아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일들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열에 아홉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열에 하나만 마음에 꼭 들면 그리 나쁜 것이 아니겠지요. 그동안 있었던 숱한 별일들이 별일 아닌 것처럼 괜찮아지기도 하고요. 물론 사람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만 있으면 세계가 온전해질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내 가슴에 쿵쿵거린다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설레는 일 있을까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너였다가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다시 문이 닫힌다사랑하는 이여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

비루한 사랑 - 황규관 - 이제 애통한 사랑은 싫다 하릴없이 그늘 우거진 길가를 거닐 때 목적 없는 시간이 내게 허락될 수 있을까 가만히 생각하다 붉은 덩굴장미에서 떨어지지 않는 내 눈길 순간 뜨거운 색에 혼미해지는 정신이 너무 두려워졌다 당신의 절망과 광기를 안아 줄 힘이 없다면 오랜만의 느린 발걸음도 꽃무더기도 단지 기만일 뿐 그러나 이제는 세상에게 사기당하고 싶다 속아 사는 일, 그게 행복이란 말이지?날 받아주지 않는 당신의 지독한 절망을 나는 언제 몸으로 아플 수 있을까 그런 다음 사랑의 체위는 완성되는 것 오늘은 딱 한걸음만 당신 쪽으로 기울어졌다, 비루한 사랑아 어렸을 때, 나는 '강박'이 있었다. 길을 걸을 때 삐뚤빼뚤 걷지 않으려 했고, 목적..

조금새끼 - 김선태 -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냐고요?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쉬는 때랍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물때는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